스스로 판단하라/구원에 대한 글들

매킨토시ㅣ하나님은 누구를 구원하시는가

NOMAN 2016. 9. 7. 11:34

하나님은 누구를 구원하시는가?



하나님은 누구를 정하다 하시는가? 

"제사장의 보기에 문둥병이 그 피부에 크게 발하였으되 그 환자의 머리부터 발까지 퍼졌거든 그가 진찰할 것이요 문둥병이 과연 그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13:12, 13)

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진정한 위치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문제는 일단락된다. 다시 말해, 그의 진정한 특성이 남김없이 제시되기만 하면 더 이상 난점은 없다. 그는 그런 경지에 이르기 전에 괴로운 과정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자기의 위치를 취할 것을 거절하는 데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괴로운 과정일 것이다. 즉 그것은 진정한 자기에 대한 "모든 사실"을 그대로 제시해야만 하는 데서 오는 괴로운 과정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부터 "나는 이렇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때 그 순간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그에게로 흘러간다. 

"내가 토설(吐說)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시 32:3, 4). 

이 괴로운 과정이 얼마 동안 계속되었던가? 그것은 온 사실이 밖으로 다 제시되기까지였다. 즉 내적으로 역사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온전히 표면상에 나타날 때까지였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문둥환자에게 있어서 처음에 피부의 어느 곳에 어떤 증상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문둥병 혐의를 받는 순간부터, 마침내 문둥병이 "머리부터 발까지" 그 사람의 온몸 전체에 퍼지기까지의 문둥병자의 전과정을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진행 상태를 주목해 보면 아주 흥미있는 사실이 있다. 여기엔 조급함도 없고 무관심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더디지만 일정한 속도로 심판의 위치에 들어오신다. 그러나 일단 들어오시면 하나님은 그의 성품의 요구에 따라서 활동하셔야 하신다. 하나님은 꾸준하게 조사하실 수 있다. 그는 "칠일 동안"을 기다릴 수도 있다. 혹 그 증상에 있어서 지극히 미약한 변이라도 있으면 "또 칠일 동안"을 기다리신다. 그러나 문둥병의 적극적인 활동 상태가 발견되는 순간엔 조금도 관용하실 수 없다. 그런 문둥병자에게 내린 선고는 "진 밖에 살지니라"이다. 얼마 동안 그렇게 하란 말인가? 그것은 문둥병이 표면에 완전히 드러나기까지이다.

"문둥병이 과연 그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13:13)

이것이 지극히 중요하고 흥미진진한 진리다. 아무리 작은 반점이라도 그것이 문둥병 반점일 경우 하나님은 관용하시지 않으셨지만, 그 문둥병이 머리에서 발까지 완전히 그 사람의 전신을 덮게 되었을 때에는 그 사람은 정하다는 선언을 받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속죄의 피를 향유하기에 적절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죄인의 경우에 있어서도 꼭 그와 같다.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신다고" 했다(합 1:13). 그러나 죄인이 자기의 적나라한 진정한 위치를 취하는 순간엔 문제는 다르다. 즉 철저하게 잃어버림을 당하여 죄책을 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위치를 인정하는 순간엔 문제는 다르다. 지극히 거룩하신 자의 눈이 어느 하나도 만족히 보실 수가 없는 그런 상태의 자기의 위치를 인정하여 이젠 더 이상 악화될려야 될 수 없는 그토록 나빠진 자기의 솔직한 위치를 인정하고 나오는 순간엔 문제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엔 모든 문제 전반을 즉각적이고도 완전하게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해결해 놓으신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을 다룬다. 내가 나 자신을 죄인으로 알 때에 그리스도께서 구원하러 오신 대상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구든지 나를 한 사람의 죄인으로 보다 명확하게 입증할 수 있으면 있을수록,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나의 소유권을 보다 명확하게 설정해 주고 있는 셈이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그런즉 내가 "불의한 자"인 만큼 분명코 나도 그리스도께서 많은 불의한 자를 위해 죽으셨던 대상 중 한 사람이다. 따라서 나도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생기는 모든 유익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땅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느니라." 그런데 나는 지금 땅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만큼 분명, 의인이 아니요 "불의한 자"이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도 역시 명백한 일이다. 즉 그리스도는 나의 죄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의 희생의 결과를 즉시 즐길 수 있는 경지로 들어간다는 것이야말로 나의 기쁜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너무도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전연 아무런 노력이 요청되지 않는다. 나는 내 본연의 모습 그대로 부르심을 받았을 뿐이다. 나는 무엇이든 한번 느껴 보고 체험해 보고 실감해 보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본연의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을진대 나는 그리스도 자신이 안전한 만큼이나 안전하다. 나를 대적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죄들"(sins)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죄의 마침이 되시기도" 하셨다. 그리스도는 첫째 아담의 자녀로서의 내가 서 있는 전반적인 체제를 전부 폐지하셨고, 그리스도와 함께 친교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위치로 나를 인도해 가셨다. 그러기에 거기서 나는 하나님 존전에 서는 자가 되었고 모든 죄짐과 모든 심판의 두려움에서 해방을 받았다.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주 보혈 흘려 주시고
또 나를 오라 하시니
주께로 거저 갑니다(찬송가 339)

나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내가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성경에 의해서다. 성경은 복되고 확고하며 영원한 지식의 근거이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해 고통을 당하셨다. 그런데 내가 죄를 지녔다. 

그리스도는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그런데 나는 불의한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마치 이 세상에서 내가 유일한 죄인이나 되는 것처럼 나에게 온전하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거룩하게 효용(效用)되고 있다. 그런즉 이런 사실은 내 편에서의 사용(私用), 내 편에서의 실감이나 체험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스스로 문제를 안고 있다.

다음과 같이 토로하는 말을 얼마나 자주 듣는지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셨음을 나는 믿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죄가 사함받은 것은 실감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유익을 적용하지도 못하고 이용하지도 못하고 체험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자아가 나타난 것이지 그리스도가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이지 성경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복스러운 성경의 책장을 조사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실감이나 체험이나 또는 적용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찾아볼 수 없다. 복음은 잃어버려진 모든 자에게 적용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 내가 바로 죄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죽으셨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그렇게 느꼈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럼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 4).

이것은 온전히 "성경대로"이다. 만일 우리가 사죄받고 구원받는 일이 우리의 감정(느낌)에 따라 된다면 우리는 비극의 길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은 하루에도 수천 번씩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동일하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시 119:89).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시 138:2).

우리의 사죄와 구원에 대한 사실을 우리가 실감하고 느끼고 또 체험하는 것은 매우 복된 일임은 틀림이 없지만 그런 실감, 느낌, 체험 등을 그리스도 대신에 투입한다면 우리는 그런 것들도 가질 수 없을 뿐 아니라 또 그런 것들을 산출시키는 그리스도 자신도 모실 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만일 그리스도로 충만되어 있다면 나는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실감을 그리스도의 자리에 올려 놓는다면 나에겐 실감도 없고 그리스도도 없게 된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슬픈 현상이다.

그들은 "성경"의 확고한 권위에 안착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자기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고 있기에 확신이 없으며 따라서 그 결과란 항상 불행스러운 것뿐이다. 의심의 상태는 고문의 상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의심을 없앨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하게 "성경"의 신적 권위를 믿으면 된다. 


성경은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가? 

-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요 5:39). 
-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의 칭의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언한다(롬 4:25). 

이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나를 불의한 자라고 나에게 말해 주던 동일한 권위가 또 나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 이것보다 더 명백한 사실은 없다. 

만일 내가 불의한 자가 다소라도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전연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불의한 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나에게 거룩하게 준비되고 거룩하게 계획되고 거룩하게 적용된다. 

만일 내가 나 자신 안에 있는 또는 나 자신에 속한 또는 나 자신에 관한 것을 조금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내가 아직도 레위기 13: 12, 13을 온전히 영적으로 적용하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아직도 나는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어린양에게 나아가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문둥환자가 진정한 근거 위에 서게 되는 것은 문둥병이 머리에서 발까지 완전히 퍼졌을 때이다. 은혜가 그를 만날 수 있게 되는 곳은 거기밖에 없다.

"그가 진찰할 것이요 문둥병이 과연 그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13:13)

이 얼마나 고귀한 진리인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무서운 질병으로 덮여 있는 반점이라고는 내게 단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 나의 자아는 아직 죽은 상태에 이른 것이 아니다. 내가 진실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진정한 나의 상태를 온전히 보게 되는 때이다.



- 레위기 강해 /C.H. 매킨토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