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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라일ㅣ성경을 읽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

NOMAN 2016. 9. 14. 22:01
성경을 읽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



 1. 세상에는 성경처럼 기록된 책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책입니다(딤후 3:16). 그런 면에서 성경은 다른 모든 저작과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각 저자들이 무엇을 말해야 할지 친히 가르쳐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의 지각에 생각과 개념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런 생각과 개념을 바르게 기술하도록 지도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여러분은 자신과 같이 미약하고 불완전한 사람이 스스로 배워 기술한 바를 읽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들을 때, 유한하고 오류투성이인 인간의 의견을 듣는 것 이 아닙니다. 만왕의 왕의 불변하는 생각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받아 적도록 택함 받은 사람이 자의로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벧후 1:21). 세상의 다른 모든 책은 아무리 선하고 유용하다해도 성경과 같이 완전하지 못합니다. 이런 책들은 보면 볼수록 결점과 오류를 발견할 뿐입니다. 성경만이 절대적으로 완전합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를 장황하게 나열하느라 지면을 허비하지는 않겠습니다. 성경 자체가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책임을 가장 탁월하게 확증한다고 저는 감히 고백합니다. 성경의 자증 말고는 성경이 영감 받은 책임을 제대로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위대하고 영속적인 신비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지 않았다고 감히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말하는 합당한 이유를 제시해 보라고 하십시오. 이제 저는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며 누구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성경의 독특한 성격과 특징을 말해 보겠습니다. 제가 성경을 하나님이 책이라고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그런 부담도 없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하나님께서 친히 증명하십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각각 다른 문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성경의 영감을 반박하는 증거가 전혀 될 수 없습니다.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의 문체가 다릅니다. 바울 서신 또한 요한 서신과는 다른 문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 저자들의 기록은 모두 각각 동등하게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지역에 따라 색조나 명암이 모두 다르지만 바다는 하나입니다. 파랗게 보이는 부분이 있는가하면 녹색을 띄는 부분도 있습니다. 위치에 따라 깊이가 각기 다르고 바다 밑바닥을 이루는 성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다를 구성하는 물은 동일한 짠 바닷물입니다. 한 사람의 호흡이라도 어떤 악기를 들고 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소리를 냅니다. 플룻, 피리, 드럼펫은 각기 독특한 음색이 있습니다. 음색이야 어떻든 모두 한 사람의 호흡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행성들도 내는 빛이 각기 다릅니다. 화성, 토성, 목성이 모두 각기 독특한 빛을 발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 행성들이 반사하는 빛은 모두 한 태양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은 모두 한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진리입니다. 그러나 각 책이 말하는 진리의 모양이 양태는 성령께서 기록하게 하신 사람에 따라 다양합니다. 성경 저자들마다 손글씨와 문체가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저자와 그들의 기록을 지도하고 영감한 하늘의 인도자는 한분입니다. 모든 책이 동일한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습니다. 성경 각 장과 절, 단어 하나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을 따라 기록되었습니다.

영감에 대한 의구심과 회의적인 생각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스스로 잠잠히 성경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들이 어거스틴의 회심의 단초가 되었던 성경 읽기에 첫발을 내디딜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집어 들고 읽어라!” 성경을 집어 들고 읽음으로 무수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어 누구도 풀 수없는 매듭-편집자)이 풀립니다! 난제와 반대들이 동트는 아침의 안개처럼 금세 사라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내 “성경은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손가락으로 기록한 책이 맞다! 하나님이 이 안에 계시는데 여태 그걸 모르다니!”하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 장은 바로 이런 성경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책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을 “교훈하기 위해” 하나님이 이 책을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셨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지나갈 문제가 아닙니다(롬 3:2 15:4). 제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읽는다면, 어떻게 읽습니까?


2.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성경 밖에서는 구원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의 말이 날마다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학교가 ...안 세워진 곳이 없습니다. 도처에 대학들 있습니다. 오래된 대학은 기존의 이미지 벗고 새롭게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연일 새로운 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로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책들이 가르쳐지고 읽히고 있습니다. 모두 좋은 일입니다. 이런 현상을 저는 환영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무지한 국민이 많을수록 위험하고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국민은 압살롬, 케이틀린 와트 타일러, 잭 케이드와 같은 사람들의 현혹을 받아 악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이무리 교육을 잘 받는다고 해도,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모르면 지옥으로 내려가는 자기 영혼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잘 배운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언어들을 구사할 수도 있습니다. 천지에 관한 모든 고상하고 깊은 지식을 있을 수 있습니다.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불릴 만큼 많은 책들을 읽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늘의 별과 공중의 새와 이 땅의 짐승과 바다의 새들에 대해 줄줄이 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솔로몬처럼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왕상 4:33). 불과 공기, 땅, 바다의 모든 숨은 지식을 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경 진리를 모르고 죽는다면 가장 비참한 사람으로 죽는 것입니다! 화학으로는 결코 죄책 아래 있는 양심을 잠잠하게 하지 못합니다. 수학으로는 깨어진 마음을 싸맬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학식과 학문으로도 죽음의 침상에 놓인 베개를 안락한 것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 소망을 쥐어 준 철학은 없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람을 평강으로 인도한 자연신학은 없었습니다. 이 땅에 속한 지식, 이 땅을 위한 지식으로는 이 땅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이런 지식은 사람으로 자기와 같은 다른 피조물보다 조금 더 낫거나 조금 못하다는 이유로 잠시 우쭐하게 하거나 안절부절 못하게 할지언정, 천국으로 날아오르는 날개를 달아 주지는 못합니다. 이런 지식이 가장 많은 사람이라도 종국에 성경을 알지 못하고서는 영원한 소유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뿐입니다. 이런 지식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죽은 후에는 모두 소용없는 지식입니다.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무지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얻습니다. 문맹이라도 구원을 얻습니다. 지리적인 지식이라고 해봐야 자신이 사는 교구에 대한 것 외엔 아무것도 모르고, 심지어 영국이나 파리나 뉴욕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무지할 수 있습니다. 천과 백만이 어떻게 다른지 모를 정도로 수리에 문외한 일 수 있습니다. 자국의 역사도 모를 정도로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레미스 여왕이나, 로마제국에 저항했던 영국 이케니족의 보아디케아 여왕이나 엘리자베스 여왕 등에 대해서도 전혀 모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국가의 재정을 재무부장관이 담당하는지 전군사령관이 담당하는지 아니면 켄터베리 대주교가 담당하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과학이나 과학적 발견에 대해 전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전쟁에서 화약을 써서 승리를 했는지, 사도가 인쇄기를 써서 성경을 찍어냈는지 태양이 지구 주변을 공전하는지 아닌지 전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이 성경의 진리를 듣고 마음으로 믿었다면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만큼은 충분히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아브라함의 품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죽은 과학자는 영원한 멸망의 자리로 내려갈지라도 말입니다.

오늘날은 과학과 “실용지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결국 필요하고 영원토록 유용한 지식은 성경을 아는 지식뿐입니다. 돈이 없어도,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건강하지 못해도 친구가 없어도 천국에 이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누구라도 천국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탁월한 지성을 소유하고 엄청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도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를 모른다면 그의 영혼은 영원히 좌초된 상태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화로다! 화로다! 성경에 무지한 채로 죽은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뿐입니다.
이 장에서 바로 이 책, 성경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이 책은 여러분이 어떻게 대하는지는 결코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영혼의 구원이 걸린 문제입니다. 제가 묻는 말에 진지하게 대답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읽는다면 어떻게 읽습니까?


3. 성경과 같이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세상에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성경만이 담고 있는 모든 위대한 일을 제대로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개요만 간추려 말해서는 성경의 보화를 다 펼쳐 보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특정한 진리의 목록만 죽 나열해도 이 책을 가득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래도 성경의 부요함을 절반도 채 담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우리 영혼을 흡족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방식은 또 어떻습니까!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과, 우리를 대신해서 그분이 이루신 속죄와, 우리 죄로 인해 대가를 그분의 피로 모두 치르신 것과,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칭의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죄인의 괴수까지도 구원하고 용서하고 기꺼이 받으시는 것과 같은 진리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합니다. 성경이 아니고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진리들이 아닙니까!

위대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진술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성경은 이 이야기를 복음서를 통해 네 번이나 반복해서 들려줍니다. 각기 다른 네 증인들이 그리스도의 이적과 사역, 그분의 말과 행동, 삶과 죽음, 능력과 사랑, 온유와 인내, 그분 삶의 방식, 역사, 생각, 마음 등을 증거합니다. 성경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알아들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한 사람들의 모범은 또 얼마나 격려가 되는지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많은 사람들 - 우리와 마찬가지로 염려와 난관이 끊이지 않고, 돌봐야 할 가족이 있으며, 유혹과 고난과 질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 이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로 드러납니다(히 6:12). 성경은 이런 사람들의 삶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들의 실수와 연약함, 갈등, 경험, 기도, 찬양, 유익한 삶, 행복한 죽음 등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이들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이 변함없이 은혜로우시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언급하는 악인들의 예는 얼마나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까! 우리와 마찬가지로 비추임을 받고 지식과 기회를 얻었지만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죄를 떠나지 않고, 자신들의 길을 고집하고, 책망을 멸시하다가 급기야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진 영혼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바로와 사울과 아합과 이세벨과 유다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벌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동일하실 뿐 아니라, 지옥도 여전히 그때와 변함없이 죄인들을 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은 또 얼마나 소중합니까! “때에 맞는 말씀”이 없는 것이야말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위급한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하신 약속들을 모두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발하신 약속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자들에게 주는 성경의 소망은 얼마나 복됩니까! 성경은 평강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을 말씀합니다. 무덤 저편에서의 복락과 안식을 말씀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입을 영광스러운 몸을 말씀합니다. 심판 날에 온전히 신원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받을 영원한 상급을 말씀합니다. 이 모든 것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이 반겨 맞을 복된 장래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모든 말씀 하나하나가 진리인 바로 이 책에 말입니다.

사람의 성품에 대해 성경이 비쳐주는 빛은 정말 놀랍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며 삶의 모든 위치와 상황에서 어떻게 행하는 것이 마땅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인간 만사와 인간 행위의 이면에 있는 가장 은밀한 원천과 동기를 통찰하게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합니다(히 4:12). 잠언과 전도서에서 배어 나오는 지혜는 얼마나 달콤하고 심오합니까! 오래전 “나를 토굴에 가두더라도 초 한 자루와 성경만 있다면 세상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두 말해 줄 수 있다”고 한 목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저는 압니다.

성경이 아니고는 이런 것들을 알 길이 없습니다. 성경이 없다면 마땅히 알아야 할 이런 일들에 대해 얼마나 우리가 무지한지조차 모를 것입니다. 사람들은 숨 귀는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날마다 비치는 햇빛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이런 것들이 없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또한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이런 진리가 계시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드리운 흑암이 어떤 것인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한 권의 책이 담고 있는 보화의 가치를 온전히 분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 옛날 존 뉴턴(John Newton) 이 말한 것처럼 동인 책이 있고, 은인 책이 있고 금인 책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온 세상의 지혜를 모두 모아 만든 것과 같습니다.

이 장에서 우리가 다루는 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 책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이 보고(寶庫)를 여러분이 어떻게 누리고 있는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읽는다면 어떻게 읽습니까?


4. 현존하는 책들 가운데 성경만큼 인류에게 놀라운 변화와 영향을 끼친 책은 없습니다.

사도 시대 때 이 책이 가르치는 교훈으로 세상이 소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구 한 귀퉁이에서 몇몇 유대인을 보내 사람이 보기에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일을 시작하게 하신 지 천팔백 년이 지났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미신과 잔인함과 정욕과 죄악들이 온 세상에 가득한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종교는 모두 거짓일 뿐 아니라 무익하며, 반드시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세상 선포하라고 그들을 보내셨습니다. 옛 습관과 풍습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삶을 살도록 축구하라고 그들을 보내셨습니다. 사람을 가장 비천하게 만드는 우상숭배, 패역하고 역겨운 부도덕, 당시의 기득권자, 오래도록 이어 온 집단, 완고한 제사장, 조롱하는 철학자, 무지한 대중, 잔인한 황제, 로마제국의 모든 권력과 싸우라고 그들을 보내셨습닏. 돈키호테의 행동만큼이나 허황되게 보이고 도무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일을 하라고 이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어떻게 준비시키셨습니까? 육신적인 무기로 준비시킨 것이 아닙니다. 동의하라고 압박할 수 있는 세상적인 권세를 주시지도 않았고, 돈을 뿌려서 믿음을 사도록 세상적인 재력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이들의 마음에 부으시고 성경을 손에 쥐어 준 것 뿐입니다. 성경의 교리를 선포하고 설명해 주고, 이 교리로 촉구하라고 명하신 것뿐입니다. 1세기의 기독교 설교자들은 마호메트처럼 칼을 차고 군대를 대동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음란한 우상을 섬기는 힌두교 사제들처럼 육신적 쾌락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면허증을 가지고 백성을 꾀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성경이 전부인 거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흥왕하게 되었습니까? 몇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이들은 성경의 교리로 자신이 속한 사회의 모습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습니다. 이교 신들을 섬기는 신전들이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우상숭배를 고사시켰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가장 고상한 도덕적 관계가 자리하게 했습니다. 여성의 인격과 지위를 고양시켰습니다. 순수함과 품격의 기준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검투사의 싸움과 같은 잔인한 관습을 종식시켰습니다. 이들을 통해 사회가 맛보게 된 변화를 열거하면 끝이 없습니다. 핍박과 반대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승리가 이어졌습니다. 곳곳에 만연했던 악행들이 하나둘 씩 자취를 감췄습니다. 사람들의 기호와 상관없이, 이 모든 것이 이 새 믿음의 등장과 함께 자취를 감춘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새 믿음의 권세아래 굴복한 것입니다. 온 땅이 흔들렸습니다. 이들이 안전지대라고 만들어 놓은 부패한 도피처들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새 믿음이라고 하는 이 홍수의 수위가 높아짐에 따라 무너진 이들의 잔해 역시 그 허망한 기초에서 들려 떠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나무는 점점 무성하고 우람하게 자라갔습니다. 이 나무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하려고 이들을 결박하던 구습의 사슬은 새끼줄과 같이 허망하게 끊기고 맙니다. 이 모든 일이 성경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라 말로 진정한 승전가가 아닙니까! 그에 비하면 알렉산더, 시저, 말버러, 나폴레옹, 웰링턴의 승리가 다 무엇이란 말입니까! 정도로 보나, 완전함으로 보나, 결과로 보나, 영속성으로 보나, 성경이 일군 승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이루는 승리에는 아무 것도 비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저 영광스러운 종교개혁 시대에 전 유럽을 뒤집어 놓은 책입니다. 오백 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의 역사를 읽으면 당시 기독교 신앙을 고백했던 교회에 드리운 어둠을 발견할 것입니다. 얼마나 칠흑같은 어둠인지 마치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기독교는 심하게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죽음에서 다시 일어났다면 당시의 기독교가 정말 자신들이 전파했던 기독교인지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시대에 있었던 이교주의가 기독교란 이름으로 다시 발흥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복음의 가르침에는 인간의 전통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고해, 성지순례, 면죄부, 유물숭배, 형상숭배, 성인숭배, 마리아숭배가 사람들이 고백하는 신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우상이었습니다. 사제들과 교회의 목사들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토록 끔찍한 흑암을 물리친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독일의 개신교가 자리하게 된 것은 단순히 루터와 그 동료들의 설교 때문이 아닙니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이 교회의 세력을 뒤집어엎는 지렛대 역할을 했습니다. 영국에서 교황주의가 패퇴한 것은 단순히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와 다른 영국의 종교개혁자들의 저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존 위클리프(John Wyeliffe)가 성경을 번역해 파종한 것이 이런 엄청난 결실을 가져온 것입니다. 영국 사람들의 마음이 교황에게서 점점 멀어진 것은 단순히 헨리 8세와 교황 간의 갈등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번역하고 이 성경을 교회에서 사용하도록 왕실이 재가하여 누구나 원하는 대로 성경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국과 독일과 스위스에 개신교의 대의가 자리할 수 있었던 주된 원인은 성경이 배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종교개혁 1세대가 저무는 동시에 백성은 이전의 올무 아래로 다시 들어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음으로 대중의 마음이 참된 신앙의 원리가 누룩처럼 번져 갔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히 열렸습니다. 영적인 지각이 열렸습니다. 교황주의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확연히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순전한 복음의 탁월함이 그들 마음에 새로운 토대로 자리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교황이 발하는 출교의 위협조차 모두 부질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왕과 여왕들이 나서서 불과 칼로 개신교 신앙이 가는 길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미 많이 알아 버렸습니다. 빛을 본 것입니다. 기쁨의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진리의 맛을 본 것입니다. 흑암 가운데 잠자던 이들의 마음에 태양이 떠오른 것입니다.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벗겨진 것입니다. 이들 안에서 성경이 그 본연의 역사를 이루었고 이 역사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백성은 다시 이집트로 내려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영적인 시계를 거꾸로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성경으로 인해 지적이고 도덕적인 혁명이 촉발 되었습니다. 성경이 불러온 진정한 혁명이었습니다. 베르토(ReneAubert de Verrot)가 기록한 혁명들이 다 무엇이란 말입니까? 프랑스와 영국이 경험한 세속 혁명은 성경을 통해 일구어진 혁명에 비할 것이 못됩니다. 어떤 혁명도 성경을 통해 이룬 것처럼 피를 흘리지 않고, 만족스럽고 영속적이 결과를 가져온 것은 없었습니다!

열방의 안녕이 이 책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 신앙을 인정하는 모든 나라의 안녕과 장래는 이 책을 아는 지식과 떼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존중하는가, 성경의 빛 가운데 행하는가, 도덕적인가, 참된 종교를 추구하는가, 선한 법을 입법하고 자유를 보장하는가 하는 것이 한 나라의 흥망을 결정합니다. 저와 함께 역사의 페이지를 넘겨보면 이런 증거를 수도 없이 발견할 것입니다. 열왕들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악들이 만연했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요시야 왕 때에 성전 한 귀퉁이에서 하나님의 율법책이 발견되었겠습니까?(왕하 22:8) 그것도 율법책을 찾으려고 찾은 게 아니라 성전을 수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유대인들은 어떠했는지 보십시오.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얼마나 끔찍합니까? 그들의 신앙은 또 어떻습니까! 하지만 자기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했던 이들이었기에 이는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마 15:6). 중세의 교회를 보십시오. 이때에 교회에 만연했던 무지와 미신은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성경의 빛이 없었기 때문에 흑암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문명사회에 세워진 많은 탁월한 명성 있는 기관들 가운데 성경에 빚을 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공공의 혜택과 유익을 위해 사람들이 받아들인 많은 선한 것들의 기원을 따라가 보면 결국 성경에까지 미치는 것이 정말 많습니다. 성경이 받아들여진 곳 어디나 그 영향이 계속되고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법들이 성경으로부터 왔습니다. 기독교 국가들에 널리 알려진 진리, 정직, 남편과 아내의 관계 등에 관한 도덕의 기준 역시 성경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이교도 사이에 큰 차이 -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크게 인정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 가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가장 자비로운 선물인 주일 역시 성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구제와 자선 기관역시 성경의 영향으로 세워졌습니다. 성경이 온 세상으로 전파되기 전까지만 해도 병자, 가난한 자, 나이든 자, 고아, 정신병자, 정신지체자, 시각장애자 등은 거의 사회에서 소외되고 무시되었습니다. 아테네나 로마의 역사를 샅샅이 살펴보십시오. 이런 약자들을 돕는 기관이나 법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지금 성경을 조롱하는 너무나 많습니다. 성경이 없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갔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조차 성경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믿지 않는 노동자는 우리나라의 시설 좋은 병원에 누워 치료를 받으면서도 자신이 지금 누리는 모든 안락함이 자신이 그토록 멸시하는 성경 덕분이라는 사실을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없었다면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두려울 정도로 자신들이 성경에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성경을 통해 얼마나 많은 혜택을 입고 살아왔는지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책이 바로 지금 우리가 다루는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성경을 어떻게 읽는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승전을 거둔 제독에게 수여된 검,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의 군함, 메나이 해협을 잇는 강관교를 떠받치는 수압 등 엄청난 권세와 힘을 발휘하는 이 모든 것은 세간의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이 책은 이런 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은 능력을 발휘하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주목 받아 마땅한 성경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읽는다면 어떻게 읽습니까?


- 존 라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