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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ㅣ04 속사도 시대의 증거

NOMAN 2017. 12. 1. 23:18
4. 속사도 시대의 증거 (A.D 100-300) P29-33

신약성경이 씌어지던 시대에 씌어졌거나, 그보다 후에 씌어졌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록된 정경의 반열에 포함되지 못한 저작들과 신약성경 간에는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저작들 속에도 주시할 만한 점들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신약성경과 비교해 볼 때 확실히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것들은 성경을 해설하거나, 진리를 옹호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제자들을 훈계하고는 있으나, 이미 사도시대부터 시작되어 후에 급속도로 강화된 신약성경의 거룩한 진리로부터 점차로 멀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1) 클레멘트(Clement)
   - A.D 96년에 죽음.
   - 1세기 후반 로마의 지도적 목회자.  

사도 요한이 살아 있을 당시 로마 교회의 장로였던 클레멘트가 고린도인에게 보낸 서신에는 구약성경의 의식에서 차용해 온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구별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전하는 그의 마지막 당부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이 감독자로 삼은 자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고 그들에게 강론했다고 기술하고 있다(사도행전 20장의 내용). 사도행전 20장의 전체적인 문맥을 보면 “장로”와 “감독”은 같은 사람에 대한 언급이며, 한 교회에 그러한 사람이 여러 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이그나티우스(Ignatius)
   - A.D 110년에 죽음
   - 사도 요한의 제자
   - 안디옥 교회의 감독

그의 저작을 보면 그도 역시 사도들 중 몇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에게 어떤 우월성과 권위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증명할 수 있는 바가 아닐 뿐 아니라 클레멘트에 의해 주장된 것을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사도행전 20장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바울이 밀레도로부터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 감독자들과, 장로들을 불렀다”고 말씀을 유추 해석함으로써 한 용어를 가지고 두 가지 직분을 도출해 내었다. 

그리고 그는 “에베소의 감독뿐 아니라 주변 도시로부터 여러 명의 감독들이 갔던 것”으로 해석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에베소 교회에 몇 명의 감독들(overseers or bishops)이 있었다는 사실을 혼란시켰다.

3) 터툴리안(Tertullian)
  - A.D 160 ~ 225
  - 북아프리카의 교부.
  - 양태론(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하나님의 다른 모습일 뿐 별개의 인격이 아니라는 주장)을 공격함. 
  - 말년에는 몬타니스트 운동에 가담

2세기 초에는 침례를 받음으로 중생한다는 교리가 확산되고 있었고, 성찬 예식이 사제에 의해 집전되는 신비스로운 종교의식으로 바뀌어졌다. 이 두 변화에 의해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구별은 더욱 촉진되었다. 지역 교회의 감독은 더 넓은 지역을 다스리는 대감독(Metropolitans)의 통제를 받았는데, 이렇게 감독들이 지배하는 성직제도가 성행함으로 인하여 교회 안에 인간이 만든 조직이나 종교적 형식이 자리잡게 되었고 이것이 성령의 능력과 역사 및 성경의 지도하심을 대신하게 되었다.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이 없었던 초대교회 시대에도, 아주 작은 교회가 더 큰 교회에게 중요한 일을 도울 수 있는 “선발된 사람들”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때때로 감독들의 지역 회의가 열리기도 했으나 2세기 말경까지는 단지 어떤 특별한 경우에 형편을 보아서 관계된 자들이 함께 모여 협의해야 할 때에 한해서 열렸던 것이다. 터툴리안은 이에 대하여 “강제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교회 간의 영향력은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이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4) 오리겐(Origen)
   - A.D 185-254
   - 알렌산드리아의 감독
   - 난해한 성경을 풍유(알레고리)로 다루었음.

오리겐 - 원숙한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매력과 심오한 가르침, 깊은 통찰력으로 인해 그가 죽은 이후에도 그의 가르침을 이어나가는 헌신적인 사람들이 따르게 되었다. 그의 열정과 심오한 내면 세계는 일반적으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틀은 그의 가르침이 이단적이라고 보게 되었다. 그의 부지런한 삶은 온통 성경올 해석하는데 바쳐졌다. 그의 위대한 작품Hexapla(6개 국어 대조판)가 있음으로 해서 다른사본들 간의 편리한 비교가 가능해지기도 했다. 

 *오리겐에 대한 우리 교회의 견해(홍정현P)

   기원후 250년경 오리겐이 성경 말씀은 단지 성경 진리의 알맹이를 숨겨놓은 껍질에 불과하다는 착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을 은유적이고 영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을 은유적이고 영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의 학파를 창설하였다(=알렉산드리아 학파). 그 때부터 교회와 성경은 엄청난 곤욕을 겪게 되었으며 교회의 대부분은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지상 왕국을 세우실 것을 믿지 않게 되었다.
- 18세에 클레멘트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에서 가르쳤다.
- 약 6,000개의 저작(책,편지) 남김.
- 스스로 자신을 거세하고 독신생활함
- 그는 사단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언젠가는 하나님과 교제를 다시 회복할 때가 올 것이라고까지 가르쳤다. 이 때에 지옥은 텅텅 비게 될 것이라는 주장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 오리겐은 영원한 지옥을 부인했으며, 궁극적으로 인간은 다 구원될 것이라고 하였다(홍정현/생명의 빛/ 지옥)
- 오리겐은 천년왕국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영지주의와 오리겐 
(하루만에 꿰뚫는 기독교 역사/P40-41)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이 점차 교회에서 빠져나갔지만  그들의 거짓 가르침은 교회에 자국을 남겼다. 특별히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Origen)에게 짙은 흔적을 남겼다. 

A.D 202년 알렉산드리아에 박해의 바람이 몰아칠 때, 오리겐의 부친은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했다. 당시 16세였던 오리겐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교의 길을 걸으려 했지만,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옷을 감추는 바람에 알몸으로 밖에 나갈 수 없어 목숨을 건졌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오리겐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새 신자들을 양육하는 교회학교의 책임을 맡겼다. 

처음에 오리겐은 영지주의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으나 종종 그들과 유사한 생각에 빠지곤 했다. 오리겐은 하나님의 창조가 원래 영적인 것이었지만 인간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께서 물질적, 육체적 세상을 만드셨으며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사탄을 포함하여) 죄 없는 영적인 상태로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가르쳤다. 

오리겐도 말시온처럼 모든 육체적 욕망과 안락을 포기했다. 그는 마태복음 19장 12절 말씀에 문자적으로 순종하여 스스로 거세했으며, 포도주 대신 물만 마셨고, 신발도 신지 않았다. 오리겐은 다른 많은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크리스천들에게 성경을 탐구하여 신비로운 메시지를 얻으라고 촉구했다. 

크리스천들은 원래 일부 신자들만이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다는 사상을 거부하고 있었지만, 오리겐의 영향을 받은 많은 교사들이 영적인 비밀을 캐내기 위해 계속해서 어려운 구절들을 설명해나갔다. 1세기 크리스천들은 ‘성’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폐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전 7:3-5 참조). 그러나 3세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육체적인 즐거움을 부정하게 되었으며 결혼을 독신에 대한 가능한(독신보다 그다지 성스럽지 못한) 대안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5) 키프리안(Cyprian, 카르타고의 감독) 

거리낌 없이 “카톨릭 교회”라는 말을 사용했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다. 콘스탄틴이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구 가톨릭 교회”, 즉 “보편적인 입장”을 천명하면서도 자기를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배척하는 교회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키프리안은, 교회 안에 성경을 회복시키고자 시도하는 가운데 노바티안에 동조했던 사람들에 대한 글에서 “카톨릭 교회에 적대하면서 이루어진 불법적인 성직수여의 사악함”이라고 그들을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그는 노바티안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리스도 교회 안에 있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 오직 하나의 교회.. 하나의 감독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키프리안 (하루만에 꿰뚫는 기독교 역사/P55-56)

AD 247년에 로마는 건국 1,000년을 맞이했다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 나와 시흘밤낮을 마시고 떠들며 로마의 천 번째 생일을 기념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 은 대부분 난잡하고 방탕한 이교도들의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파티가 끝난 후 역병이 로마 전역을 휩쓸었다. 로마인들은 크리스천들이 로마의 신들을 진노하게 했기 때문에 그런 재앙이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데카우스(Decius) 황제는 진노한 신들을 달래기 위해 범제국적으로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은 크리스천들을 박해할 목적으로, 우상에게 제사를 드린 시민들에게 ‘제사증명서’를 발급했다. 제사 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은 시민은 크리스천으로 인정되어 신분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현장에서 체포 투옥되었고 고문을 받았다. 이때 오리겐을 포함한 많은 감독들이 옥중에서 입은 상처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데키우스 황제가 A.D 251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 가혹한 역경도 금세 끝이났다. 

크리스천 가운데 가혹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 우상에게 제물을 바친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박해가 끝나자 그들이 교회로 복귀하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회개했다고 주장했지만 교회로 복귀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가 진정으로 회개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거짓 신자들을 배제하고 회개한 크리스천만을 다시 받아 들일 수 있었을까?

이 문제에 봉착한 사람이 북아프라카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안(Cyprian)이었다.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키프리안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숨어 있기를 원하시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여 도피했다. 그런데 박해가 그쳐서 교회로 돌아와 보니 모든 신자들이 흔돈 상태에 빠져 있었다.

키프리안은 박해 당시 가짜 제사증명서를 소지하고 다녔던 크리 스천들을 다시 받아주라고 촉구했다. 단, 그런 크리스천들은 교회가 그들을 용인하기 전에 슬픈 마음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외면적 증거를 보여야 했다. 어떻게? 키프리안은 기도와 금식을 요구했다. 키프리안은 적어도 진정한 신자라면 내적 회개와 아울러 외적으로도 회개했다는 표시를 나타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키프리안의 접근방식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북아프리카의 크리스천들은 순교를 피하려고 의식적으로 애쓴 사람은 진정한 신자가 아니라고 여겼으며, 박해자들에게 조금이라도 협력한 감독은 어떤 유효한 예배도, 성만찬도, 세례도 집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람들을 도나투스(Donatus) 라는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나중에 ‘도나티스트’ {Donatists)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