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판단하라/기독교 변증

칼람Kalam 논증

NOMAN 2014. 11. 4. 17:16

칼람Kalam 논증




칼람 논증은 우주가 영원 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주에도 시작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논증입니다.


이 논증은 기독교 철학사들이 처음 정식화했지만 중세의 이슬람 사상가들이 이 논중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이후로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습니다. 칼람이란  ‘이야기’  또는 ‘담화’ 를 뜻하는 아랍어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의미는 더 광범위해서 철학이나 신화에 가까운 뜻을 내포합니다.


이 논증의 핵심은 잠재적(또는 추상적)무한과 실제적(또는 구체적) 무한이라는 두 종류의 무한에 대한 인식입니다. 칼람 논중은 우리가 무한 수열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지식을 이용해서 우주에는 반드시 시작점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잠재적 무한이란 수열에 또다른 수를 더해서 계속해서 증가하는 수의 집합입니다. 예를 들면, 스톱워치 상의 분초는 잠재적으로 무한합니다. 한번 시작 버튼 을 누르면 정지 버튼을 누를때 까지 새로운 수 또는 분초가 계속해서 생겨날 겁니다(1초, 2초, 3초 하는 식으로) 정지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면, 시간은 잠재적으로 영원히 더해지겠죠


하지만 잠재적 무한은 결코 실제로 무한한 것이 아닙니다. 잠재적 무한은 언제나 또다른 증가분이 덧붙여질 가능성이 있는 유한한 수의 집합일 뿐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증가해도 무한하게 되는 순간에는 결코도달할 수 없습니다.


실제적 무한이란 더 이상 덧붙일 수 없는 수의 집합입니다. 왜냐하면 무한의 본질상 실제적 무한은 모든 수를 포힘해서 더 이상 더해질 것이 없는 집합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한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면 거기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적 무한은 물리적인 세계에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만일 물리적인 세계에 실제적 무한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말 그대로 말도 안되는 상황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죠 가령 여러분이 무한히 많은 수의 CD를 가지고 있다고 해 봅 시다. 또 각 CD에는 무한히 많은 수의 노래가들어 있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CD 하나만 들어도 모든 CD에 들어 있는 노래를 듣는 것과 마찬가지 로무한히 많은노래를듣게 되는셈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무한한 수들 끼리(한 CD의 무한한 노래 수와 무한한 CD 의 무한한 노래수가) 서로 크기가 다르네요. 물론 이런 일은생각할 수도 없겠죠. 또 하나 예를들어보죠. 여러분의 CD 보관 함에 바흐와 비틀즈의 음악 CD가 무한히 많이 있고 비틀즈 CD는 하나 걸러 하나씩 있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바흐와 비틀즈의 CD는 둘 다 무한히 많으니 비틀즈 음악 CD 개수는 바흐와 비틀즈의 CD를 전부 합해 놓은 것만큼 많은 셈이 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두 무한한 수(비틀즈 CD개수와 바흐와 비틀즈 CD를 합쳐놓은 개수)는 서로 크기가 다릅니다. 더구나 비틀즈 CD의 개수는 홀수 일까요, 짝수일까요? 둘 중에 하나겠죠. 하지만 무한수가 짝수냐 홀수냐를 따진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어린 아들을 둔 한 자동차 경주 선수가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자동차 경주 선수는 1.6킬로미터의 트랙을 몇 번이고 돌고 있습니다. 그동안 그의 세살짜리 아들은 경주 트랙 안쪽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트랙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아들은 원을 열 두 바퀴 돕니다. 그런데 만일 둘이 각기 무한한 시간 동안 원을 돈다면 두 사람이 돈 바퀴 수는 똑같이 무한 번이 되겠죠!


이런 상상들을 하다보니 골치가 아프고 뭐가 뭔지 통 모르겠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실재적 무한이 물리적인 세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지를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한 셈입니다. 앞에서 든 예들은 단순히 흥미로운 수수께기나 퍼즐이 아닙니다. X가 Y와 같으면서 동시에 Y의 12배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실제적 무한의 불합리함을 인식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 엔지니어가 설계한, 그런 다리를 건너거나 그런 차를 운전하거나 그런 집에서 살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실제적 무한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런 논증은 현실 세계의 두 측면인 시간과 인과율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 시작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이라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존재한다면 시간은 무한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지금’이라는 순간을 기차역 같은 일종의 목적지로 상상해 봅시다. 다음으로 시간을 실제로 무한히 긴 선로라고 생각해 봅시다. 만일 여러분이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승객이라면, 여러분은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 답은? 영원히 기다려야겠죠. 여러분은 결코 무한의 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무한히 긴 열차 선로에 종착점이 있을 리 없습니다. 도착할 끝도, 기차역도 없습니다. 만약 무한히 긴 열차 선로에 종착점이 잇다면 그건 마치 왼쪽 끝은 있는데, 오른쪽 끝은 없는 막대기처럼 생각할 수도 없는 개념일 것입니다. 사실 실제적 무한의 한계는 잠재적 무한의 경우와 정반대 되는 한계입니다. 잠재적 무한이 결코 무한으로 전환될 수 없는 유한한 수인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적 무한도 그 무한성의 끝에 도달하여 유한으로 전환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는 끝은 분명 있습니다. 열차는 역에 도착합니다. 이는 시간의 선로가 무한히 길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현재 이 순간보다 먼저 있었던 순간들이 무한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과거는 실제적 무한이 아닙니다. 따라서 시간에는 반드시 시작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시간에 시작점이 있다면, 무언가가 시간을 시작하게 한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인과율이 등장합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님이 원인이 된 생물학적 과정의 결과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의 글자들은 제가 컴퓨터 자판을 두들긴 결과물입니다. 하지만 각각의 원인은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예를 들면 여러분의 부모님은 여러분이 있게 된 원인일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비롯된 결과이며 할아버지, 할머니도 증조부, 증조모에게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하지만 실제적 무한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보여 주듯이 원인의 연쇄가 영원히 거슬러 올라 갈수는 없습니다. 이 경우 기차역은 현재의 원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원인들이 존재하므로 연속된 인과 관계에는 반드시 시작점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다른 어떤 것의 결과가 아닌 원인, 스스로 존재히는 원인, 즉 제1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우주는 하나의 결과이므로 우주 자체의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칼람 논증은 우주에도 시작이 있고 그 시작은 스스로 존재하는 원인에 따른 결과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그 최초의 원인은 인격적인 원인이든지 아니면 비인격적인 원인일 겁니다. 그런데 이 최초의 원인은 어떤 원인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쉽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겠네요. 최초의 원인에는 창조의 능력이 필요할 겁니다. 창조의 능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을 테니까요. 또 최초의 원인에는 창조하고자 하는 뜻, 우주를 창조하려는 의지도 있어야 하겠죠. 창조하려는 뜻이 없다면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을 테니까요. 또 최초의 원인은 비의존적인 존재, 즉 자기의 존재를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존재여야 하겠죠. 만일 최초의 원인이 다른 존재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단지 인과관계의 사슬 속에 포함된 또 하나의 결과에 불과할 겁니다. 또 하나, 최초의 원인은 초월적이라야 합니다. 우주의 원인은 우주 밖에 있고 우주와는 별개여야 합니다. 자, 이제 이 모든 특성을 종합해 봅시다. 과연 어떤 것이


- 자기 존재를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 아무것도 없는 데서 어떤 것을 창조할 능력이 있으며,

-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을 의지가 있고,

- 우주 밖에 존재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을까요?


이런 존재는 인격적 존재일까요. 비인격적 존재일까요? 물론 인격적 존재겠죠. 따라서 칼람 논증에 따르면 우주의 시작은 인격적이고 능력 있으며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자주 제기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은 하나님의 무한한 속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실제적 무한 같은 건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무한히 선하거나 자비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한 속성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일종의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에게 무한히 많은 양의 선과 사랑에 있어서 그 많은 선과 사랑을 가지고 은혜와 자비를 끊임없이 베푸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선과 사랑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들은 양으로 측정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속성의 양이 아닌 성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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