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판단하라/기독교 변증

[윌리엄 크레이그] 크리스천은 왜 기독교 변증을 배워야 하는가?

NOMAN 2015. 8. 14. 19:25



[크레이그] 
크리스천은 왜 기독교 변증을 배워야 하는가?

저는 일단 기독교 변증을 배우는 것이 왜 중요한지 세가지 이유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변증을 공부하는 첫번째 이유 - 변증의 가치와 필요성

만약 오늘날의 서구 문화권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원한다면 변증은 엄청나게 가치 있으며, 또한 필요합니다.

우리의 서구 문화는 깊숙히 포스트-크리스천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17시게와 18세기 유럽으로부터 시작된 계몽 사상의 영향입니다. 이 계몽 사상은 교회 기관과 왕정 정치, 그리고 종교의 권위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억압되지 않은 인간 본연의 진리를 추구하는 사상입니다. 교회와 국가 권위의 통치 밖에서 말이에요. 자유로운 생각이 곧 무신론적 결론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Antony Flew 같은 경우 자유로운 생각으로 증거들을 찾아나가다가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의 좋은 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문화권 안에서 계몽 사상은 지성 있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신학적 지식을 취급하지 않도록 만드는 일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신학은 진짜 지식에 대한 사료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Science)”이란 단어 자체가 지식을 뜻하는 라틴어인 Scientia 에서 왔기 때문이다. 신학은 과학이 아니므로, 지식의 산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논리적이지 않다. 물리학의 지식만이 유일하게 진리를 결정한다.]

이러한 확신에 찬 서구 문화권 속 세속주의자들의 주장이 뭐냐면, 만약 이런 생각이 움츠려들지 않고 최종 단계로 나아간다면 그 주장은 완전히 자연적인 세계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무신론 혹은 불가지론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문화적 고려가 왜 중요할까요? 간단하게 말해서, 복음은 막혀있는 상태에서는 전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인간 중심의 문화의 반대편에 섰을 때 전파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복음이 아직까지 지성적인 옵션 중 하나로 남아 있는 문화에서 자랐을 경우, 그는 복음에 대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세속적으로 닫혀 있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승려복을 입고 머리를 삭발한 Hari Krishna(힌두교의 일종) 광신도 한명이 길에서 여려분에게 전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아마 그가 이상하고, 별나고, 심지어 우스꽝스럽다고 생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New Delhi나 Mumbai(인도의 수도)의 길거리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전도한다면,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또한 훨씬 진지한 반응을 보이겠죠. 왜냐구요? 우리의 문화권과는 상관없이, 인도 문화권에서는 힌두교 신앙이 문화적으로 일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북미권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속주의로의 급격한 움직임은 유럽에서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아직 유럽에 명목상의 크리스천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오직 10%의 유럽인들만이 열정 있는 신자들이며, 그 중 오직 반만이 복음주의적 신자입니다. 현재 유럽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트랜드는 무교입니다. 1900년대에 0%였던 유럽의 비종교인의 수치는 이젠 22%에 육박합니다. 결과적으로, 현재 유럽에서 복음주의는 북미권보다도 훨씬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13년을 유럽에서 살았고, 서유럽과 동유럽의 대학들에서 가르쳐온 사람으로서, 유럽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한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고작 손에 꼽을 정도의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수 년 동안 사역을 해야 합니다. 문제는 복음 자체가 그 분들이 사역하시는 환경에서 더 이상 지성 있는 사람들을 위한 옵션으로 치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아무도 논쟁을 통해 예수님을 믿진 않아!”라고 말하며 변증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사람들은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변증가들은, 지성있고 교양 있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하나의 선택지로서 고려될 만한 문화적 환경을 만들기 위해 매우 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논쟁만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설교와 성령의 역사에 마음이 열리게끔 도와줍니다. 프리스턴 대학의 위대한 신학자 J. Gresham Machen이 그의 논문에 밝힌 바에 따르면, ‘잘못된 생각들은 복음을 받아 들이는데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는 망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불가항력적으로 전 국가, 더 나아가 전 세계에 퍼진 생각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가 온 열정을 다 바쳐 설교한다 할지라도 오직 낙오자 한 두명을 얻는데에 그칠 뿐이다.’ 아쉽게도 Machen의 글은 1913년에 이슈가 되었지만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하였고, 성경적인 기독교는 근본주의와 문화적 고립이란 옷장 속에 갇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기독교는 우리 사회와 학문의 영역에서 크게 밀려나게 되었죠. 우리가 다시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십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 모두가 거대한 기회의 역사적 순간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독교 철학이 르네상스를 맞아, 자연 신학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탐구가 활력 있게 진행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현대 과학이 초월적인 창조주, 즉 설계자에 대해서 이전보다도 더욱 열려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도의 성서 비평이 발달되어 예수님의 삶에 대해 신뢰성이 생기고, 복음서들이 다시금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 고려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21세기는 기독교 변증가로서 사역하기에 대단히 적합한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빼앗긴 문화적 입지를 다시 회복할 만큼 우리가 지적으로 잘 균형 잡혀 있다고 믿고 있고, 우리를 통해 복음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적합한 선택지로 탈바꿈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몇몇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린 논리적 증명이나 논쟁이 더 이상 무의미한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포스트 모더니즘에서는 절대적인 진리나 논리, 혹은 합리성을 부정하니까 이런 식의 변증이나 논쟁은 의미가 없어요. 다원주의자들의 문화에서는 가벼운 얘기나 좀 나눈 뒤 단순히 그들이 참여하도록 초대하는게 더 나을겁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이 현대의 서구 문화를 끔찍할 만큼 잘못 진단한 결과라고 봅니다. 우리가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유스 목회를 하시는 분들이 잘못 가르쳐 온 것 때문에 비롯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실상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거기는 말 그대로 살 수가 없는 곳이에요. 아스피린 상자나, 혹은 쥐의 독이 들은 상자의 사용법을 읽을 때는 그 누구도 다원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 두통에 시달린다면, 여러분은 아스피린 상자에 절대적으로 올바른 사용법이 쓰여져 있다고 믿을 수 밖에 없어요! 따라서 여러분은 사람들이 과학, 기술 혹은 공학에 있어서는 다원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나 윤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금새 상대주의나 다원주의적 성향을 드러냅니다. 그건 모더니즘이지 포스트 모더니즘이 아니에요! 자연 현상에 대해서는 과학이 절대 진리지만, 윤리나 종교처럼 과학으로 증명될 수 없는 문제는 개인의 성향이나 감정에 달려 있다는 생각은 지극히 모더니즘적인 생각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아직도 지극히 모더니즘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거에요. 사실 저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사탄이 발명해낸 가장 교활한 거짓말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모더니즘은 끝났어” 사탄은 말합니다. “잊어버려! 모더니즘은 더 이상 신경 안써도 돼. 그냥 썰이나 풀으라고.” 그래서 우린 논리와 증명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자발적으로 버리게 되고, 끝난 줄로만 알았던 모더니즘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매혹적인 탈을 쓰고 다시 나타납니다. 사탄이 말합니다. “너가 옛날에 하던 논쟁들은 이 새로운 시대에선 효과가 없어! 그냥 다 갖다 버려, 그것들은 무용지물이니까 이제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나누라고!” 그리고 이제 진리를 전파할 수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만약 교회들이 이런 전략에 무너진다면, 우린 다음 세대의 기독교는 절대적 진리라곤 찾아볼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 의견을 내놓는 불협화음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오직 과학적 자연주의만이 우리의 세상을 설명하고 문화를 선도하는 진리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 변증이나 증명들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은 교회의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변증을 하고 말고를 떠나서, 당연히 우리는 친절하고 겸손해야 하며, 공격적인 자세는 피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서 봤듯이, 우리는 소망의 근거를 온유함과 존중심을 가지고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덕을 갖추기 위해 다원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어요. 따라서, 우리가 더 이상 모더니즘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복음의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서 논리적인 접근이 소용없다는 생각은 반드시 버려져야 합니다. 복음이 받아 들여질만한 선택지로 여겨지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우린 사실상 아직도 모더니즘 사회에 살고 있거든요요. 그러므로 변증의 첫번째 목적은 복음 전파를 위한 문화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2. 변증을 공부하는 두번째 이유 - 변증은 성도들의 믿음을 강화하는 것.

변증은 문화 조성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삶에서도 필수입니다. 따라서 개인 차원에서 변증의 목적 중 하나는 믿음 강화라고 생각합니다. 신학교에서 교리 시험 공부를 하고 있을 당시, 아내와 저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Ann Kiemel 이란 여자와 남편 Will이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Ann을 기억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녀가 매우 예민하고 감성적인 여성들을 위한 연설자라는 것을 아시겠죠? 그녀가 삶의 이야기를 나눌 때 수많은 여성 청중들이 불과 몇 분 안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녀는 정말 특별한 사람입니다. 완전히 처음 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저 짧은 찬양과 간증을 통해 예수님께 이끌어 버립니다. 그녀는 아무리 고지식한 학자라 할지라도 그녀의 짧은 찬양과 간증만 있다면 전도할 수 있다고 자신할 만 합니다. 아무튼 우린 베를린의 한 아파트에서 저녁 식사 테이블에 둘러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연설가로서의 경험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Ann, 강연 내용은 어떻게 준비합니까?” “아, 전 따로 준비 안해요.”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준비를 안하신다구요?” 제가 말했습니다. “음, 그러면 어떤 식으로 연설을 하시죠?” 제가 물었습니다. “저는 그냥 힘들었던 일들을 나눌 뿐이에요.”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난 독일까지 와서 몇 년 동안이나 신학 교리를 공부하느라 죽을 지경인데 심지어 준비까지 안한다니!’ 그녀가 하는 사역의 효과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난 그냥 밑 빠진 독에 물이나 붓고 있는건가? 이 공부들 전부 시간낭비 아냐? 그냥 힘든 일만 나눠도 될 일이면 난 왜 이따위 공부들을 하고 있는거지?’ 저는 그 해 가을에 휴식기간을 가지려고 저의 옛 동창이 있는 투손의 아리조나 대학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는 제가 Ann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감이 완전히 꺾인 일에 대해 그 친구에게 털어놨죠. 그는 저에게 매우 안심이 되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Bill, 언젠가는 Ann kiemel이 전도한 사람들이 너를 필요로 하게 될거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맞아, 바로 그거야!’ 감정적인 경험은 어느 한계까지 밖에 여러분을 못 끌어줄 뿐더러, 어느 순간부터는 좀 더 본질적인 것들이 필요하게 됩니다. 변증은 그 본질적인 것들을 제공 해주는데에 도움이 됩니다. 제가 전국 각지의 여러 교회에 설교를 다니던 무렵에 예배가 끝나고 저를 찾아오시는 부모님들을 거의 항상 만난 것 같습니다. “우리 아들(딸)의 신앙적인 질문들을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이제 그 애들은 주님으로부터 너무나도 멀어져 버렸으요.” 이런 부모님들을 만날 때마다 제 가슴은 찢어지는 듯 합니다. 우리 크리스찬 고등학생들이나 대학생들은 온갖 종류의 무신론적 철학을 대변하는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지적인 무차별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어린 친구들을 고작 고무 칼과 플라스틱 갑옷을 입혀서 전쟁터로 내몰아서는 안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전쟁 준비를 시켜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수업을 드는 고등학생 여러분들이 있다는게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또 어린 자식들을 둔 부모님들의 참석도 정말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변증으로 무장 시켜줄 것이라고 확신하거든요.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서, 자라면서 더욱 깊이 있게 배울거에요. 그저 성경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읽혀주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가 않아요. 그 아이들은 교리가 필요합니다. 변증도 필요합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볼게요. 저는 오늘날의 부모님들이 어떻게 기독교 변증에 대한 훈련을 안 받은 상태에서 자녀를 갖겠다는 위험천만한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건 그 정도로 중요한거에요! 그러므로 정리하자면 변증의 기능 중 하나는 성도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3. 변증을 공부하는 세번째 이유 -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증이 성도의 믿음을 강화시키는데 유용하다는 사실에 동의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변증이 전도에는 무용지물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논쟁을 통해 예수님을 믿진 않아!” 제가 이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느지 모릅니다. 이런 변증에 대한 잘못된 태도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도 바울 같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위해 논쟁하는 일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그들과 논쟁하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해 설득하려고 노력했죠. 사도 바울은 아예 두란노 사원을 통째로 빌려서 2년간 매일 강의를 했고, 반대자들과 논쟁, 토론을 벌였습니다. 사도들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위해 논쟁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의 힘을 의지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오는 일에 그들의 논쟁과 증명을 사용하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변증이 복음 전파에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전도를 충분히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 같습니다. 아마도 몇번 논쟁을 해보려 시도하다가 실패했겠죠. 그리고나서 변증은 전도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 단정지어 버린 겁니다. 그들은 안타깝게도 너무 기대치가 높았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변증적인 논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 다는 것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닙니다. 마치 십자가에 대한 설교로 사람들이 많이 전도되지 않는 것처럼요. 그러니까 우리는 불신자들이 나의 위대한 기독교 변증을 듣자마자 할 말을 잃고 침묵하겠지? 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당연히 반박하겠죠!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그 사람한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건지 생각해보세요! 그러니까 반박을 당하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왜 변증이 통할 법한, 소수 중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들을 신경써야만 합니까?”

우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는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한 살마을 위해서 돌아가셨어요. 마치 오지의 사람들을 위해서 부름 받은 선교사님들이 계시듯이, 기독교 변증가들은 지적인 토론과 증명을 통해서만 전도 될 수 있는 그 소수의 사람들에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이건 오지 사람들의 예와는 좀 다른 경우지만, 기독교 변증가들을 통해 전도될 수 있는 이 소수의 사람들이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다는 겁니다.  C.S 루이스의 영향력을 생각해보세요! 그는 이런 소수의 사람들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 한명의 회심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전도가 이루어졌는지 생각해보세요! 저는 제 변증으로 인해 공학자, 의사(혹은 의학 종사자), 그리고 변호사들이 많이 회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므로 이 소수의 사람들에 대한 접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건, 변증이 복음 전파에 무용지물이라는 전형적인 생각은 너무 성급한 결론입니다. 리 스트로벨이 제게 말하길, 그의 책인 ‘예수는 역사다’와 ‘특종 믿음사건’을 통해 그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자신의 개인적인 증언을 나눌 때, 그리고 여러분이 믿는 것에 대한 좋은 답변과 증거들을 잘 준비했을 때,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전도 사역에 사용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저 자신도 대학 캠퍼스들에서 강연을 할 때 이런 체험을 정말 많이 합니다. 자, 기독교 교리와 변증에 대한 도입부를 이제 정리하기로 합시다. 저는 기독교 변증이 크리스천 제자도의 필수적인 부분 중 하나라 생가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복음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문화 환경을 조성하는데 도움을 줄 뿐더러, 성도들의 믿음을 강화시켜주며, 불신자들을 전도하는데도 유용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제가 기독교 변증에 대해 열정적인 이유에 대한 변증입니다. 이 클래스에서 우리는 기독교 교리들에 대해 배우면서, 이러한 기독교 교리들에 대해 변증하기 위해 필요한 이슈들을 살펴본 뒤, 다시 교리 공부로 넘어갈 것입니다. 이것으로 제 도입부 강의를 모두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