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판단하라/기독교 변증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을까?ㅣ더그 파웰

NOMAN 2015. 11. 25. 16:31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을까?

더그 파웰

1. 하나님일까 사기꾼일까?
2. 메시아 문제
3. 예수는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4. 신성 모독?
5. 죄를 용서하심
6. 경배를 받으심



1. 하나님일까, 사기꾼일까?

많은 사람이 예수를 위대한 스승이자 세상을 주유한 현자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예수를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신성을 실현시킨 본보기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예수를 마법사요 이단자라고 말합니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성육신 한 하나님, 육신이 된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어떤 존재라고 주장했는가?’ 예수가 실제로 기적을 행하고 예언을 성취하고 정말로 부활했다면 그 모든 일이 아무런 목적 없는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런 사건들은 예수가 특정한 주장, 즉 주로 자신이 누구인가와 관계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행한 일들입니다. 그럼 과연 예수는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말했을까요?


2. 메시아 문제

‘메시아’라는 말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또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서 두 가지 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용법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인 용법이죠. 일반적인 용법은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에 의해 인정받은 자로 간주되도록 그 사람을 어떤 직분에 임명하는 일’과 관계된 것입니다. 반면 ‘메시아’의 두 번째 용법은 구약에서 예언된 한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이 메시아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가 되어 이방인들의 통치를 전복시키고 영원한 통치권을 세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구약 예언에서는 메시아가 고난을 받으리라는 것도 예언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서로 상반되는 메시아에 대한 두 가지 묘사를 한 사람이 성취하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바로 이렇게 구체적이고 좁은 의미의 메시아 예언을 성취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을 때 많은 유대인은 그가 정말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인지, 야훼의 이름으로 한 집을 세우고 “그의 왕국의 보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할” 바로 그 사람인지 궁금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이미 장차 나타날 메시아의 모습과 그가 할 일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전과는 바뀌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다가올 메시아에 대한 이미지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인 메시아만을 믿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부터 세례 요한까지의 시대에는 그런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저작들까지 나왔습니다. 메릴 C. 테니가 말한 대로 “이 모든 저작 속에서 메시아는 그 어디서도 인류를 위해 고난받거나 개인적 희생을 통해 인류를 구속하는 인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앨버트 H.베일리스도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가 왔는데도 이스라엘이 나라를 회복하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주위에 모인 군중은 예언에 대한 오해와 근거 없는 기대감으로 왜곡된 색안경을 끼고 예수를 바라보았습니다. 실제로 나중에 예수는 메시아로 여기기에는 완전히 자격 미달인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N.T. 라이트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 메시아가 이방인들을 물리치는 대신 이방인들의 손에 죽고, 성전을 재건하거나 깨끗하게 하는 대신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면서 성전에 대한 상징적 공격을 시작하며, 이방인들에게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는 대시 이방인들의 손에 부당한 폭력을 당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관자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예수나 예수의 추종자들이 암시했을 메시아로서의 자격이나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드는 사건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실제로 성육신 한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관념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또 설령 그런 관념이 있었다 해도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실패한 듯한 예수의 모습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했지만 사람들이 그 주장을 반드시 예수의 신성에 대한 주장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3. 예수는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예수가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는 모습은 성경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1세기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나는 하나님이다.”라는 말은 거의 무의미한 말이었을 겁니다. 로마 황제들조차 자신에게 신성이 있다거나 자기가 신이라고 주장했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는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특정한 민족에게 스스로 자신이 특정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예수는 그들에게 분명하고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예수는 관용적인 어법으로, 다시 말해 당시 예수의 말을 들었던 1세기의 유대인들이 알아듣기 좋도록 그런 주장을 폈습니다. 더 이해하기 쉽도록 ‘That cat can wail’이라는 한 문장을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수의사가 이 말을 할 때는 ‘저 고양이는 우는 소리를 잘 낸다’라는 뜻이지만 노련한 재즈 연주자가 이 말을 할 때에는 ‘저 연주자는 연주를 아주 잘 한다.’ 라는 전혀 다른 뜻이 됩니다. 같은 말이라도 그 말에 대한 적절한 해석의 틀을 제공하는 것은 관용적인 어법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우리는 예수가 자신이 곧 구약 성경에 묘사된 바와 같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만일 자신이 실제로 하나님이 아니라면 불경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명백하게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또한 예수는 죄를 용서한다든가 경배를 받는 등의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특권을 행사함으로써 더 암묵적인 방식으로도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명시적인 주장과 암묵적인 주장은 자세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4. 신성 모독?

예수가 자신을 어떤 존재라고 주장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 가지 지표는 예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예수의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가 말한 내용을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요한복음 8장 52-59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 (요 8:52-59)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 당신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한 말입니까? 아브라함은 죽었고, 예언자들도 죽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영광되게 한다면,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되게 하는 분은 나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너희가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루는 바로 그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모르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만일 내가 그분을 모른다고 한다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볼 것을 생가갛며 기뻐하였다. 그는 그 날을 보았고 기뻐하였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직 오십세도 안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도 나는 존재한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돌을 집어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몸을 피해 성전 뜰을 빠져 나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왜 예수에게 그토록 난폭한 반응을 보였을까요? 먼저 주목할 점은,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도 나는 존재한다(I am).” 라는 예수의 마지막 말이 문법적으로 어색한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나는 존재한다(I am).”라고 말했을 때, 그의 말은 문법적으로 부정확한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불타는 떨기 나무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 자신을 지칭한 그 이름(‘I AM’)을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았지만 이를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은 레위기 24장 16절에 규정된 다음과 같은 계명을 이유로 예수를 즉결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은 죽여라. 모든 백성이 돌을 던져 그 사람을 죽여라"

돌을 던져 죽이는 것은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는 십계명의 제 3계명을 어긴 데 대한 형벌이었습니다.

예수의 그와 같은 명시적인 주장의 예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다른 예들도 있습니다. 

  • (요 10:30-33)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31 유대인들이 다시금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에게서 온 선한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너희는 도대체 이 중에서 어떤 일 때문에 나에게 돌을 던지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행한 선한 일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한 말 때문에 그러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소!”
  • (요 5:16-18) 16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17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항상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18 이 말 때문에 유대인들은 더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안달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고 불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 (마 26:63-66) 6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고 당신에게 명령하니 우리에게 말하시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6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말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 이후로, 인자가 전능하신 자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65 그러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했다! 더 이상 증인이 필요없다. 여러분 모두가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을 들었다.  66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존 M.프레임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주장이 잘못됐다면 예수는 분명히 신성 모독을 저지른 사람이며 우리는 왜 유일신을 철서같이 믿는 유대인들이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누구든 가차없이 죄를 추궁하려 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을 분명히 제대로 이해했다."

따라서 예수가 사용한 구체적인 표현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가 자신을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은 처형해야 한다고 규정한 율법에 대해 사람들의 오해를 바로잡아 준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는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바로 잡아 주려 했습니다.


5. 죄를 용서하심

예수는 암시적인 방식으로도 자신이 성경의 하나님임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암시적인 방식은 예수가 하나님 한 분에게만 속하는 권리와 특권과 능력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사실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가 주장한 신적인 특권 가운데 하나는 죄를 용서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마가복음 2장 3-12절에서 그와 같은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 (막 2:3-12) 3 네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중풍병 환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4 이들은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께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냈습니다. 이들은 뚫어 낸 구멍으로 중풍병 환자가 누워 있는 침상을 아래로 내렸습니다.  5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네 죄가 용서되었다.”  6 마침, 거기에 율법학자 몇 명이 앉아 있었는데,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7 ‘어떻게 이 사람이 저런 말을 하는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구나.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학자들이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곧 영으로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째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느냐?  9 이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되었다’라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침상을 가지고 걸어라’ 하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너희에게 보여 주려고 그랬다.” 예수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1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12 중풍병자는 일어나 침상을 들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걸어나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으며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을 본 적이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죄를 용서하는 일이 하나님에게만 속한 권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의 주장에 반발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여하튼 “네 죄가 용서되었다.”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이 참임을 실제로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 그 결과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 기적을 행함으로써 바로 그 일을 행했습니다. 그 기적은 예수가 곧 하나님이며 그렇기 때문에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주장을 확증해 주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 36-50절에 등장하는 또다른 예를 봅시다. 예수가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고 있는데 죄인으로 밝혀진 한 여인이 눈물과 향유로 예수의 발을 씻기는 장면입니다. 바리새인이 이 여인을 정죄하는 반응을 보이자 예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 (눅 7:36-50) 36 어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님께 함께 식사를 하자고 권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가셔서 식사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37 그런데 그 마을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식사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향유병을 가지고 갔습니다.  38 그는 예수님의 뒤쪽으로 가서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의 발을 씻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만일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지금 자신을 만지는 이 여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4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시몬아, 네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41 “어떤 채권자에게 두 사람의 채무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이 두 사람이 다 빚을 갚을 수 없어서 채권자가 모두 빚을 없던 것으로 해 주었다. 그러면 둘 중에 누가 더 채권자를 고맙게 여기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더 많은 돈을 면제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옳게 판단했다.”  44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보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아 주었다.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도 않았지만, 이 여인은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쉬지 않았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도 붓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  47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다. 이는 이 여자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가 용서되었다.”  49 예수님과 식사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속으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를 용서해 준다고 하는가?”  50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여기서도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께만 속하는 권리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고 있음을  잘 알았습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그러한 주장에 담긴 속뜻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의 주장이 곧 자신이 성육신 한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라는 주장임을 잘 알았습니다. 예수의 주장은 암시적이었지만 듣는 이들이 그 의미를 도저히 오해할 수 없는 대담하고 명확한 선언이었습니다.


6. 경배를 받으심

예수는 또한 경배를 받음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임을 은연 중에 주장했습니다. 예수가 단순히 모범적인 도덕적 사는 선한 스승에 불과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런 행동을 잘못되거나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꾸짖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의 가르침은 선한 것이 아닐 것이고 우리는 예수가 자기에게 걸맞지 대접을 받음으로써 비도덕적인 처신을 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와는 정반대로, 즉 자신이 경배받는 것이 옳고 정당한 일이라는 듯이 가르치고 행동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2,33절의 예수가 물 위를 걷는 유명한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33절에 따르면 제지들이 예수가 흔령이 아님을 깨닫고 그가 바람을 잠잠케하는 모습을 봤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며 말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31절에서 예수는 베드로의 믿음 부족을 꾸짖었지만 제자들이 자신의 기적을 보고 경배할 때는 제자들을 꾸짖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보기에 제자들의 경배는 적절한 반응이었던 거죠. 이렇게 예수가 경배를 받는 모습은 예수가 어느 장님을 고쳐 준 이후에 일어난 일을 서술하고 있는 요한복음 9장 35-38절에도 등장합니다.

  • (요 9:35-38) 35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회당에서 그 사람을 쫓아 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사람을 찾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인자를 믿느냐?”  36 그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인자가 누구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미 그분을 보았다. 지금 너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38 그러자 그 사람은 “주님, 제가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는 사실상 두 가지 주장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즉 예수는 경배를 받음으로써 암묵적으로 자신이 경배받아 마땅한 분인 성육신 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스스로 인자라고 소개함으로써 자신이 다니엘서 7장 13절에 예언된 바와 같은 약속된 메시아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말을 들은 이들은 그의 암묵적인 주장을 놓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가 경배를 받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4-16절에 바로 그러한 좋은 예가 나타납니다.

  • (마 21:14-16) 14 성전에서 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15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과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라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매우 화가 났습니다.  16 그래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이 어린이들이 말하는 것이 들립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너희는 성경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어린이와 젖먹이들의 입으로 찬양을 준비하셨다.’”


어린 아이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한 장본인이 바로 예수였습니다. 그 찬양을 예수는 꾸짖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가 인용한 구절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씌어진 시편 8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가 이 상황을 올바로 이해시키기 위해 그 시편을 인용했다는 사실은 예수가 자신을 시편 8편의 “주님”, 즉 하나님 자신이라고 믿었음을 보여줍니다.여기서도 우리는 예수가 구체적인 방식으로 특정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특정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예수는 그와 같은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단지 경배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만일 그가 실제로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는 전적으로 주제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3,24절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요 16:23,24) 23 전에는 너희가 내게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분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것이요, 너희 기쁨이 가득 찰 것이다.”

이 말은 요한복음 14장, 12-14절, 15장 16절 같은 구절에서도 발견됩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께 ‘예수님이 당신을 보내주셨어요!’ 하고 말해라.”라는 식의 단순한 권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신적인 권위로 하나님의 보좌로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일종의 권리 주장입니다.

예수는 단지 경배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만일 그가 실제로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는 전적으로 주제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