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하여 준행하라/연구ㅣ성경 주제

동물ㅣ나귀를 통한 교훈

NOMAN 2014. 4. 28. 23:38

나귀를 통한 교훈




1.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주님이 사용하신 짐승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마21:1-7).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 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 두매 예수께서 타시니”(막11:5-7).


  구약에 약속대로 왕 곧 메시야가 입성한다는 것은 가장 크게 환영하고 기뻐할 일이다.

  이 왕 곧 메시야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푸실 분이다. 이 왕은 겸손의 왕이시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게 왕이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로다.”


  주님은 겸손하여서 나귀 새끼를 사용하셨다.


  나귀는 부정한 짐승이다.


  “나귀의 첫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꺽을 것이며 너의 아들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출13:13).


  영광의 왕께서는 부정한 짐승의 새끼를 사용하셨다.

  날 때부터 나실인인 삼손은 원수를 치는데 나귀의 턱뼈를 사용하였다.

  부정한 나귀를 주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사용하시는 것처럼, 타락된 죄인을 주님께서 구별하여 사용하신다.

  작은 자를 통하여 일하시는 주님이시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가져왔을 때 주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다. 사람은 연약하므로 강한 것에 기대려고 하나 주님은 너무 강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므로 약한 것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려 하신다.


  1) 지상만민 중에서 가장 작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


  2) 예수님은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1-2)


  3) 평범한 제자들을 택하셨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 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4:18-22)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 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행4:13).


  4) 초대 교회 성도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5) 교회 역사 속에서 주님은 작은 자를 통하여 일해오셨다. 


  겸손은 실로 기독교의 머릿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르치는 그 겸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어의 휴밀리티(Humility)는 한문의 겸손보다 한층 더 그리스도의 이상에 가까운 말이다. 휴밀리티는 휴머니티와 같이 휴머스(humus) 즉 흙이라는 어근에서 나온 말이다. 즉 “아래를 본다”는 뜻으로 몸을 땅에 붙인다든가 또는 아래를 본다는 뜻이라고 한다. 즉 귀인 앞에 나가서 자기의 비천함을 깨달았을 때의 느낌 또는 자신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어 아래를 볼 때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베드로가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깨닫고 무릎을 꿇은 것과 유사하다.


  기독교의 겸손은 자기의 가치를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티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들은 십자가의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것도 마음에 두지 않아야 하며 우리들의 자랑은 오직 그 하나만이어야 한다.

  세상의 많은 비천한 일이 있는 것은 모두 우리들을 겸허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우리가 고통이라고 보는 것은 모두 우리의 구원을 온전케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여서 우리는 이른바 고통의 철학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것임을 알게 된다.

  사람을 겸손하게 하는 것은 우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의 겸손은 하나님이 아니면 하실 수 없는 겸손이며, 이 겸손으로 그는 지금은 인류의 구세주로 계신다. ...........주님이 그 영광을 버리고 우리 인류 속에 오셨으니 그의 종인 우리들은 곧 영화, 쾌락 같은 것을 모두 떠나서 주님이 명령하시면 어디든지 가야 하는 것이다. 주께서 십자가의 치욕을 받으셨으니 우리는 세상의 조롱이나 박해 정도에 물러나서는 안된다.


  또한 아름답고 즐거운 생애란 겸손의 생애이다. 겸손이 아니고서는 평화도 만족도 없다.


  시인 하이네의 말에 “ 너의 오두막을 골짜기에 세우라. 산꼭대기에 짓지 말라 ”는 것이 있다. 즉 행복이란 세상 사람들의 앙망, 주목하는데는 없다는 뜻이다. 인망을 얻고 남의 칭찬을 받으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질투와 미움의 원인이 되는지는 조금이라도 세상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우리는 왜 성을 내는가. 우리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우리에게 불평이 있는가. 우리 마음 속에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단수도 만일 영으로 나누면 무한과 같다는 철학자 노발리스의 말은 참으로 큰 진리이다. 재물을 늘이는 방법의 첫째는 세상의 보통 방법, 즉 재물을 증식시키는 방법이다. 둘째는 기독교인의 방법으로 욕망을 줄이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겸손한 사람이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냉수 한 잔과 빵 한조각 밖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던 소크라테스는 그리이스의 제일의 인물이었다./우찌무라간조




2. [참고] 부정한 나귀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 암나귀가 그 성욕이 동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렘 2:24).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출13:13).


  구약 율법에서 나귀는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축으로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없는 짐승은 오직 나귀뿐이었습니다. 돼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중요한 가축이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돼지를 집안에서 기르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길렀습니다. 방목을 했던 것입니다. 돼지는 우리에게는 유용한 짐승이지만 율법에서는 부정한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서는 돼지고기를 식용으로 먹지 않았습니다. 


나귀는 가축이었지만 부정한 짐승으로 취급되었던 것은 나귀는 말과에 속한 동물이면서도 굽이 갈라지지 않았고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부정한 동물로 분류되었습니다(레11:1-8).


그러나 나귀는 유용한 짐승이기 때문에 가정의 많은 일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나귀를 살리기 위해 어린 양으로 대속하지 않으면 그 목이 꺾이게 됩니다(출13:13, 34:20). 나귀와 같이 부정한 동물을 살리기 위해서는 정결한 동물로 그 생명을 대신해서 바쳐져야 했던 것입니다. 이 때 나귀를 대속하기 위해 사용된 짐승이 어린 양이었는데 어린 양을 대신 바치므로 나귀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정결하지 못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대속되지 않으면 필요한 곳에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귀가 어린 양으로 대속되지 못했을 때 그 나귀의 “목을 꺾을 것이며”라는 준엄한 심판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린양으로 대속되지 못할 경우 부정한 짐승에게 내려질 가차 없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대속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 내려질 심판을 상징적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나귀는 부정한 동물이었기 때문에 거룩한 일에 사용될 수 없는 짐승이었지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것은 부정한 짐승이라도 하나님은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나귀와 같이 부정합니다.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특히 성막과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은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있는 무너뜨릴 수 없는 담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성소휘장이 찢어진 것은 대제장만이 율법의 규례를 따라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부정한 사람이라도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진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나귀를 살리기 위해 어린양이 희생되었듯이 모든 인류를 살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신 것을 굳게 인식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