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판단하라/성경 질의응답

질문03 - 아브라함은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쳤을까?

NOMAN 2016. 9. 26. 20:24
아브라함은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쳤을까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창 22:1~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 곧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독자, 아주 나이 많아 얻었기 때문에 더 많은 애착이 가는 이 자식마저도 아낌없이 드렸다.”는 방향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이 해석은 곧이어 성도들에게 이런 적용을 가져옵니다. “여러분도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도록 하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있어 늦게 얻은 이 독자보다 더 귀한 것이 있있겠습니까? 여러분도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린다.”는 주제가 결코 성경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문제는 토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과연 이 본문이 그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가?”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린다는 것은 당연히 옳지만, 본문이 가장 귀한 것을 바친다는 개념으로 가르치고 있느냐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본문은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잃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했을 때에 그는 하나님께 “가장 사랑하는 것을 드린다.”는 생각으로 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통상적인 해석과 매우 달라 보이지만, 교회가 자주 ‘목적'을 위하여(이 본문에서의 목적은 성도를 헌신시키려는 목적입니다.) ‘본문’을 왜곡하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보는 눈에 문제가 있어서지, 성경을 잘 살 펴보기만 하면 사실 이것은 발견하기 어려운 독특한 해석은 아닙니다. 성도는 항상 “성경이 앞서 가고 거기에 자신의 뜻을 맞추어 가야” 합니다. 반대로 자신이 먼저 길이나 목적을 정해 놓고, 거기다 “성경을 끼워 맞춰 자신의 목적을 충족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본문을 슬쩍 훑어 보고는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놀라운 헌신을 도출해 내어 성도들에게 헌신을 요구합니다. 목적을 위해 성경을 왜곡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성도들에게 무언가 요구를 하거나, 은혜나 감동을 조장하는 것은 말씀하신 하나님을 비웃는 일이 됩니다. 교회는 무엇 보다도 이런 일에 민감해야 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왜 이 본문이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과 관계없는 것일까요? 이 본문이 진짜 의도하고 있는 바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먼저 생각해 볼 점은, 창세기 22장 본문에서 나타나는 점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창 22:5 개역한글 성경).

5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신 후, 아브라함과 이삭이 두 사환들과 함께 길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여 사환에게 한 말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사환들에게 거기에 있으라 명한 후, 이삭과 자신 둘이서만 제사드릴 곳으로 올라갑니 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구절에 사용된 동사의 ‘수’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말의 경우, 주어에는 ‘단수’,‘복수’ 가 나타나지만, 동사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즉, “ 아브라함이 산으로 올라갔다.”와 “아브라함과 이삭이 산으로 올라갔다.” 에서 동사는 ‘올라갔다’ 로써, 단수이든 복수이든 같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우리말 외의 다른 언어들 중에서는 동사도 성, 수, 격에 따라 변화를 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기록 언어인 히브리어도 이런 류의 언어에 해당합니다. 즉, 히브리어에서는 주어가 단수일 때 사용하는 동사와, 복수일 때 사용하는 동사가 모양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국어에서는 주어가 아브라함이든,아브라함과 이삭이든 동사에 변화가 없지만, 히브리어에서는 “아브라함이(단수) 산으로 올라갔다.”와 “아브라함과 이삭이(복수) 산으로 올라갔다.”의 ‘올라갔다’ 가 모양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어에서 5절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히브리어에서 5절의 동사는 모두 1인칭 복수형입니다. 5절에서 아브라함은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겠다.”에도 복수형 동사를 사용하고 있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에도 복수형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우리가 경배하고, 우리가 돌아오겠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사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독자 이삭을 바치기로 작정했다.”는 생각에 치명타를 입힙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고 오겠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그는 돌아올 때는 혼자여야 하므로 ‘돌아오겠다’ 라는 말에는 복수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브라함은 지금 이삭과 “함께” 가서 예배하고, 이삭과 “함께”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애초에 하나님께 이삭을 드리고 혼자 돌아올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반갑게도 새로 번역한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이것을 '우리’를 넣어서 번역을 했습니다. 아마 이 내용을 알고 있는 분이 번역을 한 것 같습니다.

창세기 22장 5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이와 같이 분명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돌아올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설명에 대해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에이! 그거야 그냥 이삭이나 사환들이 듣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창세기 본문에서만 증거되는 바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다른 본문에서 이 사실을 발견하고 비로소 창세기를 보았더니 창세기에도 과연 복수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이 사실은 신약 성경 히브리서에 명시적으로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제일 서두에 히브리서 본문을 써 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7〜19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 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본 절의 내용을 하나씩 음미해 보십시오. 17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다.”에서 이 “약속을 받은 자로 되”라는 말은, 이삭이 약속의 자녀,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네 자손이 많아져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되리라.”고 하셨던 그 약속의 자녀임을 가리킵니다. 이삭은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태어난 아이입니다. 따라서 이삭은 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이 이삭을 통해 약속을 성취하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삭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이 이삭이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태어난 아이인데……”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그 아이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약속이 성취되어 자손이 많아지려면 이삭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가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은 무산됩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의 강조점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그 이삭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를 부연 설명하는 것이 18절입니다.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 암으리라 하셨으니.”

“네 자손이라 칭할 자”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은 ‘이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이삭이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은 거짓말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을 죽여 제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딜레마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이삭을 통하여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이삭을 죽여 제물로 삼으라고 하시는가? 아마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중을 헤아리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 아브라함끼 봉착한 상황은 두 개의 계시가 충돌을 일으킨 상황입니다. “아들 이삭을 통하여 자손이 번성할 것이다.” 라는 약속과 지금 네 이들 이삭을 죽여 제물로 바쳐라.” 라는 명령은 상식적인 방법으로는 전혀 공존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고민은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달라고 하시는구나……아! 어찌할꼬……그러나 할 수 없지 하나님께서 달라고 하시니 드릴 수 밖에……” 이런 종류의 고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믿었고, 따라서 자신의 후손이 이삭으로 말미암을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고민은 자신의 가장 귀한 아들을 하나님께 어떻게 드릴까 하는 종류의 고민이 아닙니다. 이삭이 죽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아브라함보다도 하나님이 더 잘 알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고민은 “왜 하나님은 서로 상충되는 두 종류의 말씀을 주시는고!”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을 약간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언약과 명령의 충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믿었던 놀라운 바가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의 성취로 주신 언약의 자녀 이삭을 왜 죽이시겠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언약과 명령이 충돌될 때, 그것을 ‘부활 신앙’ 으로 극복했습니다. 즉! 아무도!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도 믿지도 못했을 때에, 아브라함은 인생의 궁극적 절망인 사망을 “하나님은 이기실 수 있다!”는 점을 믿었던 것입니다.

과거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기 이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초월적인 능력을 완전하게 신뢰하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 완전하게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고의로 아주 늙어 아이를 가질 수 없을 때에 부르셨습니다. 인간적 의존을 꺾기 위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도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행로 에서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통해, 집에서 길리운 종 엘리에셀을 통해, 첩에 의해 얻은 자녀인 이스마엘을 통해 이 나라를 이루어 보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태어나게 하신 사건이 “죽은 태를 여신”(롬 4:19) 사건 임을 경험한 아브라함은 변화합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를 로마서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이삭을 죽여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미 보여 주셨던 하나님의 능력” 곧, 사람의 능력을 완전히 끊는 방법으로써의 이삭의 탄생을 경험한 아브라함은 다시 다가온 이 언약과 명령의 충돌을 부활 신앙으로 이겨 냅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는 일련의 사건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를 하나님께 바치러 모리아 산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일 결심을 하고 가긴 했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다시 실려 주실 것이라 믿고 그 산으로 올라갔던 것 입니다. 즉 그는 아들과 함께 내려올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환들에게 “우리가 가서 예배하고”,“우리가 돌아오겠다”라고 말 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것을 드린 아브라함”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신자는 상식과 언약이 충돌할 때,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확장해서 말하자면 이 본문은 우리에게 “부활 신앙이란 사망을 극복하는 것” 즉, “인간의 모든 상황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 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다루지는 않았지만, 이 본문은 더 나아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제사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 이심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얼마나 교회에 많이 헌금을 해야 할 것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는 방법"을 발견합니다. 이 사건의 언약적 풍성함이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전달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 윤석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