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생각하라/신앙 유감

아더핑크ㅣ합력하여 선을 이룸

NOMAN 2019. 1. 10. 13:13



합력하여 선을 이룸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지난 수세기에 걸쳐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복된 구절로부터 힘과 위로를 얻었는지 모른다. 시험과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을 때, 이 말씀은 그들을 떠받쳐 주는 반석이 되어 왔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일들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것 같고 세상 지혜로 볼 때에는 일들이 나쁘게만 되어가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정반대라는 것을 믿음으로 아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고무적인 선언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는 것인지 모른다. 그들은 그 결과 불필요한 두려움과 의심에 시달리게 된다.


 “모든 것이 합력한다(All things work together).”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되도록 움직이실 수 있는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영화로우신가! 끊임없는 활동 중에는 두려운 악의 요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이 세상에는 피조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 수효를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지 않은가.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에 상반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얼마나 많은 반역의 무리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가. 얼마나 많은 초인적인 세력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 위에 계셔서, 고요함 중에 방해를 받지 않으시며, 모든 상황에 대해 절대적인 주권을 쥐고 계신다. 그분은 고귀한 위엄의 보좌에서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신다(엡 1:11). 그러므로 그가 보시기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며, 그들은 자신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는”(사 40:17) 분 앞에 두려움으로 서야 한다. 그리고 이 “지존무상(至尊無上)하며 영원히 거하시는”(사 57:15) 분 앞에 머리 숙여 경배해야 한다. 최악으로부터 최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께 소리 높여 찬양을 드려야 한다.


 “모든 것이 작용한다(All things work)." 자연 상태에서는 진공과 같은 상태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도 지음 받은 목적을 이루는 데서 벗어나는 것은 없다. 그중 어느 것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계획된 사명을 감당하기에 충분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공급받는다. 만물은 창조주의 기쁨이라는 원대한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모든 것은 그의 피할 수 없는 명령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


 “모든 것이 합력한다.” 모든 것을 작용할(operate)뿐만 아니라 서로 협력한다(co-operate). 만물은 무엇 하나 빠진 것이 없는 완벽한 연주로 제 몫을 담당하고 있지만 들을 귀를 가진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들의 조화로운 선율을 감지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합력하는데 제각기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상대방의 한 부분이 되며 서로에게 기여하면서 합력한다. 이것이 바로 난관이 보통 연쇄적으로 들이닥치는 이유이다. 먹구름 위로 또 다른 먹구름이 솟아오르고 폭풍우도 잇달아 온다. 욥의 경우와 같이 비보(悲報)를 알리러 온 사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더 큰 비보를 알리는 사환이 달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헤아린다. 요리에서 좋은 맛을 내는 비결은 여러 가지 요소를 잘 배합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시다. 그분의 섭리는 “작용”할 뿐만 아니라 “합력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저 이스라엘의 감미로운 시인의 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저가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시 18:16).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 역경이 아무리 많이 들이닥치고 아무리 거세게 압도해 온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모두 하늘에서 신자들에게 주어질 기업을 얻도록 하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가장 무질서한 일들을 다스리시고 가장 해로운 일들을 바꾸어 우리에게 선한 것이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얼마나 경이로운가! 우리는 계속 활동 중인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놀라며, 끊임없이 계절을 바꾸셔서 이 땅을 새롭게 하시는 것에 놀란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분께서 인생의 온갖 복잡한 사건들 가운데서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내시는 것과, 파괴적인 경향을 띠는 사단의 역사 속에서 사단의 악의와 능력을 변화시켜 당신의 자녀를 위한 선으로 바꾸시는 이것이 더욱 경이롭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이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는 모든 것이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의 절대적인 통제 하에 놓여 있기 때문이고,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 오직 우리의 유익만을 원하시기 때문이며, 셋째는 제아무리 사단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다시 말해서 보다 더 큰 우리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머리카락 한 터럭도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 자체가 선하거나 선한 경향을 가진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우리의 유익이 되도록 역사하신다. 우리의 삶에 그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란 결코 없으며, 우연한 사고도 없다. 모든 것은 우리의 유익이라는 목적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모든 일들은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구별된 사람들에게 축복으로 작용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모든 고통과 슬픔과 손해들을 이용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구분 짓는 두드러진 특성이다.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그 반대의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비록 그들의 종교적인 신조(信條)는 세부적인 면에서 다를 수가 있고, 그들의 교회 조직에 외견상 차이가 날 수 있으며, 그들의 은사나 장점은 같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들은 구주를 주신 그분의 인격적 탁월성-그의 거룩하심과 지혜와 신실하심으로 인해 그분을 사랑한다. 그들은 그분이 하시는 일, 곧 그분의 제지(制止)와 허락, 그분의 꾸짖음과 승인으로 인해 그분을 사랑한다. 그들은 심지어 징계하시는 회초리로 인해서도 그분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것을 합당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 가운데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 중에서 성도가 그분을 사랑하지 못하게 할 만한 요소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믿는다. “우리가 그를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그러나 슬프게도 나는 얼마나 하나님을 적게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참으로 자주 나의 사랑이 부족한 것을 슬퍼하며 내 마음의 냉랭함 때문에 자신을 책망한다. 자아에 대한 사랑이나 세상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도 많기 때문에 나는 이따금 내게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자문하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나의 열망이야말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좋은 징후가 아닐까? 내가 하나님을 그렇게도 적게 사랑한다는 것을 슬퍼한다는 사실은 내가 하나님을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감사치 않고 굳어진 마음이 있다는 사실은 모든 시대에 걸쳐 성도들의 마음을 슬프게 해왔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하늘에서 오는 열망이지만, 땅에 속한 본성의 방해와 저지에 의해 늘 제약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타락한 육체로부터 벗어나서, 빛과 자유의 세계를 향한 해방된 길을 선포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여전히 땅에 속한 본성의 방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Dr. Chalmers)


 “부르심을 입은 자들” 이 “부르심”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을 통해서 볼 때, 그저 외적으로 복음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 결코 아니다. 이 말은 언제나 내적인, 그리고 효력이 있는 부르심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 부르심은 그것을 만들거나 파기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관여할 수 없는 그러한 부르심이다. 그래서 로마서 1:6,7 및 다른 많은 곳에서,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이러한 부르심을 받았는가? 목사님이 여러분을 불렀을 수가 있고, 복음이 여러분을 불렀을 수가 있으며, 양심이 여러분을 불렀을 수가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내적이고 항거할 수 없는 부르심으로 여러분을 부르신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영적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세상에서 그리스도께로, 자아에서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은 적이 있는가? 이것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 위대한 순간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그 감격적이고, 생명을 주는 음악과 같은 그 부르심이 여러분의 영혼의 연주회장에서 울려 퍼져 메아리친 일이 있는가? 하지만 어떻게 자신이 그런 부르심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바로 여기에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해주는 한 가지 시금석이 있다. 그것은 진정으로 효력이 있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그분을 미워하는 대신 이제 그는 그분을 존경한다. 두려움 속에서 그분으로부터 달아나는 대신, 이제 그는 그분을 찾는다. 자신의 행위가 그분을 영화롭게 할까 아니면 욕되게 할까 하는 것에는 관심도 없었던 생활에서, 이제 그의 가장 큰 바람은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된 것이다.


 “그 뜻대로(According to His purpose)” 이 부르심은 인간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 결정적인 구절을 있게 한 성령님의 의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 오로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기인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결코 그들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때문인 것이다.


 또한 이 중요한 구절 속에는 실제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 이 은혜로운 교리는 그저 어떤 신조(信條)를 만들어내는 것 이상의 더 중요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목적 가운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두려움에 짓눌리고 근심으로 무너져 내려 사랑의 하나님께조차 전혀 합당치 못하게 된 그러한 감정을 흔들어 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러한 사랑이 끊임없이 우리 마음속에서 흘러나오게 되고 과거에 그러한 사랑을 북돋아 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에 그러한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할 계획들이 고리처럼 이어져 계속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우리가 믿는 진리를 기억하라고 그처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는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흠정역에는 “기억하고(keep in memory)”],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전 15:2).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벧후 3:1)라고 말하고 있으며 주님께서도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이 새로워지는 때는 바로 우리의 가증스러움과 전적인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때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들에게 손을 내미셔서, 불붙는 나무와 같은 우리를 불길로부터 건져 내신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할 때, 우리의 마음은 감사와 찬미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영원하신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은 제외되고 우리는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더욱 깊어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서두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사도가 성도의 일반적인 경험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알거니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것은 머리로만 믿는 믿음, 그 이상의 것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단지 강렬한 바람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이 그렇게 잘 되어가기를 바란다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뿌리 내리고 있는 지식이며,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오는 지식이다. 그것은 믿음의 지식이며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분의 자비로운 손길로부터 모든 것을 받는 그러한 지식이다. 물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어 있을 때에는 이러한 지식으로부터 충분한 위로를 받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믿음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에도 이 지식은 우리를 북돋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다면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주님을 든든히 의뢰하고 있다면, 이 복된 확신은 우리의 것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 26:3).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와 아주 유사한 야곱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는 명백한 예증(例證)을 얻을 수 있다. 먹구름이 그를 뒤덮었다. 시련은 가혹했고 그의 믿음은 두려울 정도로 흔들렸다. 그의 걸음은 거의 실족할 뻔하였다. 그의 탄식을 들어보자. “이때 야곱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내 자식들을 잃게 하는구나! 요셉도 없어지고 시므온도 없어졌는데 너희가 이제 베냐민까지 빼앗아 가려고 하니 모든 일이 다 나를 괴롭게만 하는 구나”(창 42:36,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그의 흐릿한 믿음의 눈으로 보기에 음침한 색깔로 뒤덮인 듯 하던 그러한 상황이, 사실은 그의 노년을 구름 한 점 없는 영광의 광채로 장식하게 하려는 순간에 벌어졌던 것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그에게 선을 이룬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난 받는 영혼들의 “많은 환난”은 머지않아 끝이 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밝고 밝은 빛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 자신들에게 영원한 선을 이루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